박태기나무 꽃 / 임두고
늦은 사월
사방이 수초처럼 젖어 있어
까닭 모를 내 그리움
그 속 깊은 곳까지 젖고 있다.
문득 젖은 알몸으로 다가서는
뜰 앞의 박태기
박태기나무 꽃들은
그저껜가 그그저껜가
계단 위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던
그녀의 치마폭처럼
자줏빛
지울 수 없는 자줏빛이다.
박태기
박태기나무 꽃이여
하필이면 네 꽃 이름이 박태기인가
아무렇게나 불리어진
네 꽃 이름으로 인하여
나는 지금 아무렇게나 나뒹굴던
어린 시절
마른 수수깡 팔랑개비처럼 가벼워진다.
그리움은 젖을수록 가벼운 날개를 다는가
내 가슴은 지금
그 모순을 접어 만든 팔랑개비
누가 작은 바람기만 건네도
천만 번 회오리치며 돌아버릴 것 같은
미쳐버릴 것 같은
가벼움 속으로….
나는 지금 그렇게
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있다.
박태기
박태기나무 꽃이여
네 꽃이 핀 것은
이제 더 이상 너만의 문제가 아니다
그리하여 네가 지금 비에 젖고 있음은 더더욱
너만의 문제가 아니다.
네 꽃은 이제
까닭 모를 그리움의 배경 속에
젖을 대로 젖어
타인의 가슴 속 깊이 아무렇게나 번지고 싶은
한 사내의
자줏빛 진한 그리움의 빛깔일 뿐
진실로
진실로
젖어도 지워지지 않는
한 사내의 무참한 그리움의 빛깔일 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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